2016. 5. 3. 19:21 욕조






  춥지 않았던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새학기가 시작된 학교는 벚꽃으로 새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이른 아침, 교실 문이 열리고 불쑥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카게야마는 먼저 앉아 있는 쿠니미 아키라를 바라보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일렁이듯 스친 눈빛이 따끔거렸다. 맑개 개인 창문 너머 얇고 가는 빛이 교실 안으로 들어온다.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햇빛을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얗고 투명한 햇살이 내리쬐는 곳에 쿠니미 아키라가 있었다.






Different 






  조례가 시작된 후 자리를 정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했다. 나른한 담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교실 안, 비슷비슷한 높이의 정수리들이 나란히 앉아있는 것을 보며 카게야마는 교탁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제비를 뽑았는데 다행히도 앞자리는 아니었다. 아마 앞에 앉았다면 다시 돌아갔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하얀 종이 위에 적혀 있는 번호를 따라 2분단의 가장 뒷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쿠니미의 옆자리였다. 카게야마는 책가방을 들고 그 자리에 가서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았다.


  곧 종소리가 들리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어쩐지 올해 들어 가쿠란이 더 갑갑하게 조여오는 것 같다. 어차피 수업 시간은 의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1교시는 들어야할 것 같아 가방을 뒤적거려 필통을 꺼냈다. 그런데 샤프도 연필도 들어있지 않았다. 헛웃음을 지은 카게야마는 그대로 멈췄다. 늦봄의 하늘은 그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을 만큼 푸르고 청명했다. 


  쿠니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까. 카게야마는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없어 입을 작게 열어 말했다. 


“카게야마 토비오야.”

“알아.”


  한 마디를 하고 쿠니미는 곧 무관심하게 교탁으로 걸어오는 선생을 바라보았다. 진녹색 칠판에 새하얗게 글자가 번지도록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쿠니미 아키라를 처음 알게된 것은 작년 가을이었다. 쿠니미는 전학생이었고 카게야마의 옆 반, 그러니까 킨다이치와 같은 반이었다. 킨다이치는 카게야마의 몇 없는 친구였기 때문에 둘의 유일한 접점이기도 했다. 그래서 쿠니미와 카게야마는 작년 동안 눈으로만 서로를 익히고 있었다. 


  새학기가 시작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깨달은 사실 중 하나는 쿠니미가 이동 수업을 귀찮아 한다는 것이었다. 무슨 첫 수업부터 이동 수업이야. 아이들의 원성은 이내 곧 썰물이 빠져나가듯 사라졌고, 교실이 텅 빌 때까지 쿠니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종이 치기 3분 전에야 쿠니미가 미술 책을 꺼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쿠니미는 키가 컸다. 딱히 같이 가려고 기다렸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잠에서 늦게 깨어난 카게야마는 쿠니미와 더불어 교실 문을 잠그고 나오게 되었다. 


“너희 같은 반이야?”


  복도에 나오자 우연히 교실을 지나가던 킨다이치와 마주쳤다. 킨다이치는 둘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쿠니미와 카게야마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딱히 누군가 먼저 대답하지 않다가 카게야마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쿠니미와 카게야마는 곧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지나쳐 미술실로 향해 걸었다. 미지근한 바람결이 둘의 교복을 훑고 지나갔다.  


“출석부 어딨어.”

“…….”

“주번 누구니?”

“죄송합니다. 여기요.”


  주번은 아니었지만 뒤늦게 문을 열고 들어온 카게야마가 출석부를 건넸다. 남아있는 자리는 아주 맨 앞자리의 한 줄과 맨 끝자리 한 줄. 고민할 필요도 없이 카게야마는 스크린이 내려간 채 어두컴컴해진 교실 뒷자리로 걸어갔고, 쿠니미 또한 카게야마를 따라 앉았다. 스크린에는 빛바랜 고전 영화의 시퀀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미술 시간에 왜 음악 영화를 틀어주는거지. 미술 선생은 작년에도 자주 영화를 보여주며 자신의 설명을 곁들이곤 했다. 모든 예술은 궁극적으로 다 같은 곳으로 통한다는 소리였지만 결국 수업 내용과는 상관 없었다. 아무렴 수업을 하는 것보다는 영화 한 편이 나았다. 카게야마는 침묵 속에서 어린 소년이 발악하는 모습을 무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른들은 소년들의 입장을 생각해주지 않았다. 소년은 그대로 우악스러운 손길에 끌려가며 울었다. 카게야마는 옆을 바라보았다. 스크린을 바라보는 쿠니미의 얼굴에 영화 장면이 환몽처럼 어지럽게 비치다 사라졌다. 


  미술 시간은 두 시간이었지만 결말 부분을 보지 못하고 종이 울렸다. 전부 다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어쩐지 교실로 돌아가는 내내 하얀 분을 칠하고 오페라를 부르는 남자의 얼굴이 계속 생각났다. 남자가 노래를 부르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괴로워 하면서도 왜 노래를 불렀을까. 남자는 왜 자신의 형에게 평생 그 곡을 완성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비난했을까. 






  카게야마는 배구에 재능이 있었다. 배구할 때의 카게야마는 평소와 매우 달랐다. 간혹 잡지에도 소개되어 배구계를 이끌어 갈 유망주라고 불리었다. 곧 유스 엔트리를 기다리는 카게야마는 꽤 이른 나이부터 배구를 시작했는데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도 않을 정도로 줄곧 배구만을 좇았다. 아마도 실업으로 갈 가능성도 있겠지만, 스포츠 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해 대학 리그부터 천천히 시작할 가능성이 컸다. 카게야마가 입학한 학교는 전국에 자주 출장하는 강호교로 카게야마는 때때로 오후 수업에 빠지기도 했고 교사들도 수업시간에 자는 카게야마를 딱히 나무라지 않았다. 


  이번 학기 체육 시간에는 배구 활동이 포함되어 있었다. 리시브하는 건 조금 귀찮은데. 쿠니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얀 빛줄기 아래서 카게야마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리시브 상대가 되어주거나 멀쑥하게 서 다른 아이들을 도와주었다. 배구부답게 공을 쳐내는 폼이 누구보다 깔끔했다. 이 반에는 카게야마 외에도 배구부원인 아이가 두 세명 더 있었다. 그들이 카게야마와 대화를 나누는 건 한 번도 없었지만.


  타앙. 배구공은 멀리 튕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네트 저편으로 쭉 뻗어 나갔다. 카게야마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저런 표정을 짓는 카게야마는 본 적이 없다. 정말 좋아하는구나, 배구. 솔직하고 거리낌없는 카게야마를 보자 쿠니미는 어쩐지 학교가 끝난 뒤 카게야마의 부활동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둘 씩 꽃이 지고 짙푸른 녹음이 교정을 덮었다. 곧 시험 기간이었다. 내신을 생각하고 있는 아이들은 벌써부터 시험 공부를 하기도 했다. 쿠니미는 그런 부류에 속해 있지 않았지만 의자를 당겨 앉으며 책을 폈다. 담임이 환기를 자주 시켜 교실 안에는 바람과 미세한 먼지 냄새가 났다. 세계사 시간. 연도와 사건이 나열된 연표를 바라보다 교실 안의 침묵에 어느 순간 시선이 멈췄다. 선생은 수업이 끝나기 전 질문을 할 것 같았다. 19일. 카게야마의 번호는 19번이다. 


“19번.”


  카게야마는 수업 시간에 자주 잤다. 햇살이 드리운 눈꺼풀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아마도 이른 시간에 일어나 아침 운동을 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쿠니미는 생각했다. 


“카게야마.”

“…….”

“카게야마.”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눈 언저리에서 빛무리가 흩어지며 카게야마가 부스스하게 눈을 떴다. 여전히 책상 위에 올려놓은 팔 위에 고개를 묻으면서 카게야마는 살짝 쿠니미를 돌아 보았다. 무척 나른해보였다. 쿠니미는 교과서를 가리켰다. 카게야마는 책을 바라보고도 한 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가리키는 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쿠니미는 답답한 듯 볼펜을 들어 ‘아비뇽 유수’에 동그라미를 쳤다. 카게야마는 곧 몸을 일으키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비뇽 유수입니다.”

“잘했어.”






  슬슬 낮이 길어졌다. 해가 높이 뜨고 급식실에 다녀온 후, 카게야마는 점심시간이 다 끝나가도록 다시 잤다. 시끄럽게 바닥을 구르는 소리와 교실 안 아이들의 말소리에 그제서야 카게야마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킨다이치와 그 무리는 쿠니미와 카게야마를 둘러싸고 가까이 다가왔다. 


“카게야마. 너 하루종일 자냐.”

“카레 먹고 싶어.”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웃음이 났다. 


“너네는 짝꿍이라며 왜 서로 말도 안 해. 친하긴 하냐?”

“걱정도 해주고. 고맙다, 킨다이치.”


  쿠니미의 말에 킨다이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친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모르는 게 아니라 카게야마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카게야마의 머릿속에는 누군가 친해지는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겉도는 것도 없었다. 필요한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것. 그게 학교 생활이든, 배구든. 카게야마는 남들에게 그 이상의 것을 묻지 않았고 그들도 카게야마의 선을 넘지 않았다. 


  종이 칠 때까지 킨다이치는 시시콜콜한 말들을 떠들다 갔다. A고의 3학년 배구부 주장이 대학생 누나에게 고백을 받았다는 이야기, 어제 교문 앞으로 S고의 여자 아이가 나타나 농구부원에게 고백을 한 일 등. 남자 아이들 사이에선 뜨거운 화제거리였지만 카게야마는 그런 것들에 흥미가 없었다. 그래서 문득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바라봤을 때, 하늘에 걸린 구름처럼 시야에 쿠니미가 보였다. 


“재밌냐.”


  재밌을리가. 쿠니미는 귀 옆으로 들리는 카게야마의 목소리에 흠칫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잠시 멈췄다. 자꾸만 신경쓰인다. 카게야마의 목소리와 행동이. 그 이외의 것들은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카게야마는 책상 의자에 다리를 조금 벌리고 편하게 앉아 있었다. 점심 시간이 끝나는 종이 치고 아이들이 흩어질 무렵, 카게야마는 책상 서랍으로 길게 손을 뻗었다. 쿠니미는 그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심장 소리는 안으로 파고 든다. 다가오는 여름 어귀에서 쿠니미는 한쪽 이어폰을 뺐다. 


  간지러운 바람이 불었다. 나란히 귓가에 들리는 음악 소리가 바람과 함께 가득 속을 채웠다. 차분했던 두 사람의 머리는 바람에 헝크러지고, 그 때마다 하얗고 매끈한 이마가 드러났다. 살며시 여름이 내리앉은 코 끝과 입술은 푸릇푸릇한 내음을 만끽했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카게야마는 교실을 어슬렁거렸다. 바람에 커튼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너 오늘 부활 없어?”

“체육관 점검한다고, 그냥 가래.”

“우리 둘이 주번이야.”


  그 말을 하자마자 카게야마가 칠판 모서리를 바라보았다. 쿠니미는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보았다. 아까 걔, 이름을 모르겠다. 오늘만 바꿔달래. 자기가 다음주에 한번 나 대신 주번 해주겠다고. 


  카게야마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을 매고 교실 문 열쇠를 교무실에 맡길 때까지 쿠니미는 함께였다. 부활동이 끝나면 늘 어둑했던 하늘은 여전히 밝았다. 노을빛이 서서히 물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카게야마는 기지개를 폈다. 


  집에 가는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쿠니미 집이 큰 대로변에서 꺾어지기 전까지 같은 방향에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운동화가 땅을 밟는 소리, 잎사귀가 흔들리는 소리가 오늘따라 더 크게 들린다. 


“네가 배구를 했으면 잘 했을 것 같아.”

“내가?”


  쿠니미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순간 볼에 희미한 숨결이 스쳤다. 


“나 배구한 적 있어.”

“뭐?”


  덤덤하게 말하는 쿠니미를 잡아 채고 카게야마는 크게 두 눈을 떴다. 운동화 코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렇게 크게 반응할 줄은 몰랐는데. 쿠니미는 머쓱하게 고개를 돌리며 뒷목을 쓸었다. 마른 손목과 희멀건한 목덜미가 흔들렸다. 카게야마는 단지 자신보다 조금 더 크고, 체육 시간에 안정적으로 리시브 하는 쿠니미를 보고 문득 입밖으로 내뱉었을 뿐이었다. 


왜 그만 뒀어?

그냥. 

…….

너 같은 애가 없었어. 


  쿠니미가 다시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림자는 한층 더 깊어졌다. 


  너 같은 애가 없었어. 그 말이 뭐라고. 그냥. 쿠니미가 말한 것처럼, 그냥. 문득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감정을 설명할 수 없어 카게야마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어렴풋하게, 쿠니미의 어깨 너머로 해는 산등성이를 가르고 천천히 떨어졌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부쩍 더 쿠니미와 카게야마는 하교를 같이 했다. 쿠니미가 부활동을 쉬고, 카게야마의 부활동만이 있던 어느 날엔 카게야마가 발목을 접질러 일찍 하교한 적이 있었다. 그 날 두통으로 하루종일 말이 없던 쿠니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하며 반색을 했다. 핸드폰에 쿠니미의 번호가 저장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가방이라도 들어줘?”

“뭐?”


  카게야마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쿠니미를 바라보았다. 꼭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이라 웃겼다. 톡 튀어나온 입술은 어쩐지 오리를 닮아있었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카게야마의 말이 가관이었다. 됐어. 나 어차피 가방에 들고 다니는 것도 없어. 그 말을 듣자마자 쿠니미가 카게야마의 가방 밑단을 툭 쳤다. 정말이지 가벼웠다. 


  학교에서 주택가로 걸어갈 때까지 보이는 풍경은 넓고 고요했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전학을 온 이 지역은 쿠니미가 살던 곳과는 정반대였다. 수평선까지 뻗어 있는 보리 밭과 갈대 잎사귀들이 바람을 따라 크게 흔들렸고, 이어진 강둑에서부터 불어오는 물결 냄새가 코 끝을 두드렸다. 


어지럽다. 

…….

카게야마, 어지럽다. 


  볼에 쿠니미의 숨결이 또다시 스쳤다. 카게야마가 그저 두눈을 깜빡이는 동안, 웃음소리는 사그라 들었고 새하얀 볼이 기울어지듯 어깨에 닿았을 뿐이다. 


  쿠니미와 만나고 돌아갈 때마다 분을 칠한 남자의 얼굴이 희미하게 생각났다. 가만가만 높이가 비슷한 주택가 위로 보랏빛 노을이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카게야마는 걸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눈을 감는 동안엔 아까 들판에 피어있었던 꽃망울들이 어둠 속에서 톡톡 터졌다. 따뜻하고 울렁거렸다. 






  살짝 접지른 것이라더니 그 이후로도 카게야마는 일주일 간 부활동을 하지 못했다. 코트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래도록 스트레칭을 하거나 일학년들을 대신 지도했다. 그럴때면 카게야마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도 카게야마는 매일 같이 체육관으로 향했다.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떠올리다 교문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렸다. 삼십분이나 더 기다려야 할테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쿠니미는 배구부가 사용하는 체육관으로 향했다. 풀벌레 소리가 어둑해진 늦저녁 하늘을 가로질렀다. 


  체육관 문은 꽉 닫혀있었지만 안을 정리하는 탓에 매우 부산스러웠다. 쿠니미는 창틈으로 다가가 새하얘질 정도로 밝은 체육관 조명 아래 서있는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2학년과 3학년들은 온데간데 없고 그 주위로 1학년들이 대걸레로 바닥을 미는 모습만이 보였다. 


  다 끝나가나보다. 그렇게 생각할 때 즈음 카게야마가 3학년 선배로 보이는 사람 앞에서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수그렸다. 분위기는 굳어지고 남은 1학년들은 눈치를 살피며 슬슬 체육관을 벗어나고 있었다. 


카게야마. 제대로 안 할래?

아닙니다.

말대답 꼬박꼬박 하지마라.

죄송합니다. 


  카게야마는 자신을 나무란 3학년 선배가 나갈 때까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한숨을 쉬며 무릎 서포터를 내리며 주저 앉았다. 체육관에 홀로 남은 카게야마는 옆에 있던 물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쿠니미는 저도 모르게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인기척에 카게야마가 고개를 돌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쿠니미가 바라보는 게 어쩐지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운동한 탓인가. 열이 올라 볼이 발갰다. 


“너희 주장이야?”

“아니, 그냥 3학년 선배.”

“…….”

“별 거 아니야. 그냥 내가 잘못해서‥.”

“그런 사람 질색이야.”


  카게야마의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그 안의 짙푸른 눈동자가 더이상 말을 찾지 못하고 동글동글 굴러갔다. 거짓말을 못해서 오히려 솔직한 눈빛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카게야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쿠니미를 바라보았다. 나는 네가 어렵다. 나는 너에게 다 들키는 것만 같은데, 나는 사실 너를 모른다. 그래도 어쩐지 괜찮은 것 같다. 


“고맙다.”


  카게야마는 결국 픽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더 위태롭게 보여 쿠니미는 머리가 아팠다. 손에 닿은 쿠니미의 손이 뜨겁게만 느껴졌다. 심장 고동소리가 코트 안을 뛰어다닐 때처럼 쿵쿵 들렸다. 그리고 까만 머리카락이 아슬아슬 기울어질 때, 카게야마가 쿠니미를 떨어트렸다. 


“선배.”


  눅눅한 여름바람이 다 지나가기도 전에 다 뭉개지고 말았다. 바람은 갈대도 꺾고, 풀을 길게 눕힌다. 화들짝 놀라 손가락도 떨어지고, 입술도 볼도 맞대지 않은 채였지만 어쩐지 심장이 아팠다. 선배는 놓고온 물건을 가지러 왔다고 한다. 카게야마는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돌아가고 쿠니미를 바라봤을 때, 소년은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날 이후, 쿠니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잠에 들면 불안하게 흔들리던 3학년 선배의 동공이 생각났다. 그 한 명의 눈은 곧 전교생의 눈이 되어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를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3학년 선배는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부활동도 꼬박꼬박 나갔다. 그는 곧 졸업을 하고 아무런 관계 없는 사람이 되며, 카게야마도 3학년이 된다. 그런데도 마음이 저리다. 


  카게야마는 아무 말 없이 옆에서 걷는 쿠니미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우리는 더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더 가까워 지기 전에 멀어져야 했다. 카게야마도 그 정도는 판단할 수 있었다. 아주 조금만 드러났을 뿐인데도, 무수히 괴로웠다. 이대로면 앞으로의 밤도 괴로울 것이었다. 


  한번도 인정한 적 없는 마음이지만, 그 후로는 돌이킬 수 없었다. 그렇기에 더 두려웠다. 비바람을 닮은 현실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혹독했다. 자신의 감정을 꺼내 쿠니미에게 보여주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고, 그럴 용기가 제겐 없었다. 


  계절이 달라져도 그대로인 갈대 밭을 보면서 쿠니미는 팔을 뻗었다. 바람 소리에 묻혀 아무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쿠니미의 품은 훨씬 더 따뜻하고, 풋풋하고, 아늑했다. 


  두려웠다. 카게야마는 입을 막았다. 내 마음과 네 마음이 같았고, 우리의 성별이 같았고, 그 이외에는 다 달랐다. 그래서 할 수 없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엔 불안한 것들이 많았다. 꼭, 우리 나이처럼.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면,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었다. 


  난 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확신하는거지. 머릿속으로 선생님부터 부모님, 친구들, 배구까지 평소에는 명확히 인식해본 적도 없는 것들이 꽉 차들었다. 머리가 복잡해서 터질 것 같다. 카게야마는 눈을 가리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 바람을 타고 차라리 사라지고 싶다.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고, 너에게 솔직하게 말도 꺼낼 수 없다면. 


  뺨에 쿠니미의 숨결이 스치며 멀어질 때, 빗방울이 하나 둘 씩 떨어졌다. 툭, 툭. 마음이 젖는다. 


   




  여름 방학이 되었다. 비슷하던 키가 조금 더 달라졌다. 누군가 먼저 쳐다보면 마주보던 눈빛이 어긋났다. 흐린 우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생각보다 괴롭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열 여덟일 뿐이었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마을에 내린 비는 뉴스에도 나올 정도로 십여년 만에 내린 엄청난 폭우였다. 보기만 해도 휩쓸릴 것만 같다. 부모님이 나간 사이 카게야마는 우산을 꺼내 들고 잠시 밖을 나섰다. 현관을 다 나서지도 않았는데 물웅덩이에 빠지고 발목까지 물이 차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끝이 났다. 그냥 겁만 난 채, 알면서도 다가가지 못했다. 서로 다가가지도, 열어주지도 못해서 끝이 났다. 


  모든 것이 젖어가던 여름 날, 쉴 새 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모든 것이 끝이 났다. 





posted by 퍄pya